800원 ‘삥땅’한 버스기사 해고를 정당하다고 한 오준석의 가혹한 판결은 가진 자의 재산을 예방적으로 보호
반면 민중의 권리는 무방비로 침해 당해
권력, 무력에 의한 테러뿐 아니라 화해·상생 담론에 의해 이중으로 희생 당하는 국민 민중
과거에 대한 사적 화해·용서, 미래 예방 기제로서의 제도적 응징·처벌은 서로 구분해야
화해·용서가 반드시 상생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더한 질곡을 재생산할 수도
공적 차원의 화해·용서는 그 피해가 집단에 미치므로 집단적 동의 절차 거쳐야
대법관 오석준이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 재판장이던 당시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기사를 해고한 버스회사의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2011. 12.) 그 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으로 2,4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17년 동안 일해온 버스기사를 해고한 회사 처분이 정당하다는 대법 판결이 나왔다. 이때 재벌 총수들 횡령 사건과 대비되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판이 쏟아졌다고 한다.(경향신문, 2022.8.3.)
그러나 이 판결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여부로만 이해해서 안 되는 측면이 있다. 2회에 걸쳐 800원 횡령했다고 해고한 처분을 정당하다고 본 것은 미래에 대한 예방으로서 경고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두 번도, 단 한 푼도 ‘삥땅(뜯어먹기)’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비장한 판결은 회사 측 재산을 철저하게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확실한 경고음이 될 것이다. 이때 객관적 피해 규모의 다소에 따른 처벌 강도의 적합성은 담론에서 제외된다.
문제는 이 같은 예방적 경고가 위정자 및 재벌 총수 등 권력, 금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법농단 판사 임성근, 안전행정부 장관 이상민, 검사 2명(안동완, 이정섭)은 국회에서 탄핵되었으나, 헌법재판소(헌재)가 그 탄핵을 무효로 했다. 국회의 탄핵을 헛된 짓거리로 만들어버리는 9명 헌재 관료의 결정으로, 급기야 공직자는 300인 선출직 국회조차 깔보고, 비리 저지르기를 겁내지 않을 전망이다.
판사 임성근의 경우, 헌재 결정의 근거는, 잘못이 있으나 이미 사표를 냈으므로 실익이 없다는 것이었다. 헌재의 이 같은 결정은 사법의 예방적 기능을 애초에 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판사는 누구라도 사법권력을 마음것 농단하고, 들키면 사표만 제출하면 될 것이라는 본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장관 이상민과 검사 안동완의 경우에는, 다소간 잘못이 있으나, 탄핵 당할 정도는 아니라는 취지였고, 이정섭에 대해서는, 검찰이 필요한 자료를 다 넘겨주지 않은 가운데, 졸속으로 국회의 탄핵 무효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자기 보호는 수단과 방법을 불문한다. 편파적, 아전인수적인 법 해석 및 적용뿐 아니라, 불법적 테러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 반민족적 행위자 처벌을 위한 ‘반민특위’를 테러를 동원하여 해체함으로써, 과거 청산의 기회를 원천 봉쇄했다. 그 후 반민족행위자는 이승만 정부하에서 다시 미군정에 편승하여 독립운동으로 가뜩이나 피곤한 민족주의자들을 벼랑으로 몰아붙였다.
돌아보면, 권력과 금력에만 권리가 있다고 믿어온 자들은, 그들의 권리만을 고귀하게 여겨, 한편으로 이를 보전하느라고, 다른 한편으로 이를 오남용하느라고 국민 민중과 사회에 끼친 해악이 한둘이 아니었으나, 이후 이러한 해악에 대한 처벌의 칼날은 너무나 느슨하였으니, 이래저래 온갖 피해는 민중의 몫으로 내려앉게 된다는 사실을 접하게 된다.
민중이 당하는 이 같은 질곡은 민중 자신의 오줄없는 화해·상생 담론에 의해 더욱 가중된다. 권력을 가진 자에게 하고한 날 당하고만 살아서, 민중은 거꾸로 권력자를 벌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혹여 그런 권력이 손에 들어와도, 이를 행사하는 데서 겁을 내는 것 같다. 잘못을 범한 권력자를 처벌했다가는, 그로 인해 혹여 스스로 더한 질곡에 처할 수 있다는 염려가 앞서는지도 모른다. 처벌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염려와 불안이 더욱 큰 민초에게는 화해·상생의 담론이 속 편한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래저래 소심하고 겁많은 민초들은 예방의 처벌 기제를 활용하지 못하고 제풀에 움츠려들고 주저앉아버리므로서, 오히려 방종한 권력자들을 더 기고만장하게 하고, 자신의 입지를 더한 질곡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한국 민초의 소심함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물러간 다음 프랑스와 그리스에서 반민족 행위자들을 대거 처형한 사례와 사뭇 대조적이다. 프랑스 드골은 독일에 부역한 이들을 처형하면서, “앞으로도 프랑스는 외적의 침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외적을 도와 부역하는 이들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리스에서도 이탈리아, 독일 나치 등에 부역한 이들을 처형한 것은 그 같은 예방의 취지를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민초는 그 같은 처단에 익숙하지 못하였고, 스스로 위정자가 되거나 처벌의 권력을 손에 잡아도 그 같은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평생을 독재정권에 시달리면서, 신체도 온전하게 간수하지 못했던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자 5.18 광주 학살의 중심에 선 전두환 등을 사면했다. 이유는 과거지사를 용서하고, 화해·상생을 지향하자는 것이었다.
이때 김대중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은 처벌이 갖는 미래 예방적 기능이었다. 사형선고 받은 전두환을 철저하게 응징함으로써, 미래에 제2의 전두환이 다시 나오지 않도록 하는 데 경종을 울릴 수 있다는 그 평범한 이치를 김대중은 간과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김대중의 잘못은 전두환 사면을 혼자의 결정으로써 시행했다는 점이다. 학살을 당한 것은 민중인데, 피해자의 입장을 무시하고 혼자서 그런 결정을 내릴 권한이 김대중에게는 없다.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사면은 이미 문재인 정부하의 박근혜, 나아가 윤석열 정부하의 이명박 등 다수 파렴치범에 대한 사면을 배태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테러에 의해 반민특위를 해체함으로써 과거 청산을 방해했으나, 김대중은 화해·상생의 담론으로써 다시 권력의 오남용에 대한 예방의 기제를 말살했다. 전자는 폭력에 의한 것이었으나, 후자는 오줄없음으로 인해 스스로 처벌의 권한을 포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권력자의 권력 오남용에 의한 행위는 절대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 불굴의 신화가 되었고, 질곡의 세월에 민중이 당한 피해만 고스란히 남아 지워지지 않는 깊은 족적을 남기고 있다. 반성 없이 선례를 그대로 따른다면, 이 나라 민중의 질곡은 자업자득으로 언제나 한결같을 전망이고, 천 년이 다 가도록 빌어먹을 것만 같다.
화해·상생·용서 담론에 따른 김대중의 전두환 사면은 제왕적, 봉건적, 독선적인 결정이었다. 김대중은 화해·용서가 반드시 상생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한 질곡을 재생산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국민 민중의 정서에 반하는 대통령의 사면은 독재이다. 김대중의 전두환, 노태우 사면, 문재인의 박근혜 사면, 윤석열의 이명박 사면이 다수 민중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면 그러하다. 사적 화해·용서의 결정이 가져올 잠재적 피해는 사적인 범위에 한하지만, 집단적 차원의 화해·용서가 가져올 수 있는 피해는 집단에 미치는 것이므로 반드시 잠재적 피해자로서의 집단의 동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여기에 대통령 사면권에 대한 제한이 불가피하다. 국민 민중이 이의를 제기할 때 그 사면은 유보되고, 국민투표를 거치도록 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민주 아닌 독재 체제가 된다. 헌법에 민주국가로 규정하고 있는 바에야, 이 나라에서, 독재는 위헌이다.
지금에 와서 윤석열의 독선을 두고서만 욕할 것이 아니다. 국민 민중의 동의 없이, 덜컥 전두환, 노태우 등을 사면한 김대중의 화해·상생 담론, 또 그 김대중을 신격화하여 ‘극장의 우상’으로 떠받드는 이들에게도 다소간 책임이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미래 예방 기제는 작동하지 않고, 권력의 오남용에 대한 처벌은 깃털처럼 가벼워지며, 번번이 당하는 피해와 곤욕은 민중의 몫으로 내려앉고 있다.
여야 위정자들은 김대중을 앞세운 화해·상생의 담론을 함부 떠들지 말아야 한다. 동족 학살의 중심에 있는 전두환에 대한 사면이 미래 예방 기제를 말살함으로써 끼친 해악을 반성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 반성이란, 어설픈 검찰과의 화해로 인해 그 검찰의 손에 노무현의 죽음으로 인도되었고, 검찰 개혁은커녕 그 검찰의 편파적 칼날이 여전히 오늘의 질곡을 더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