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 권리는 정부 권력이 적극 보호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간섭하지 않는 자유의 영역으로 남겨 둬야
정부 권력이 보호하는 ‘소수의 권리’는 기득권 소수의 권리 보호 및
다수, 소수를 막론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으로 귀결
22대 국회의 원(院) 구성을 둘러싸고 여야 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민주당 대표 이재명이 “민주주의 제도는 다수결이 원칙”, “가능하면 합의하되 소수가 몽니를 부리거나 부당하게 버틴다고 해서 거기에 끌려다니면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하자, 나경원이 “이재명 대표가 한 발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국회는 다수결 원리가 아니라 합의의 원리”, “다수결로 국회 운영하면 의원 300명씩 왜 뽑나? 합의대로 원 구성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KBS라디오 ‘전격시사’, 아시아경제, 2024.6.3.)
나경원은, “다수결 원리로만 국회를 운영하면 국회의원을 300명씩 뽑을 필요가 없다. 1석이라도 많은 민주당이 마음대로 하면 되지 않나”, “(그렇게 되면) 우리 당의 역할은 하나도 없다”, “국회는 민심과 많은 의견 조정하는 과정”, “중요한 게 합의 정신인데 법대로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본인(야당 측)들은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니 걱정이 많다”(KBS라디오 ‘전격시사’), “합의대로 원 구성해야 옳다”, “이재명 대표가 다수 권력을 앞세워 의회민주주의 기본을 파괴하고 있다. 야당 대표가 앞장서서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트리는 다수 횡포를 지휘하고 명령하고 있다”(페이스북) 등 취지의 발언을 했다.
여기서 나경원은 민주 개념에 대해 논리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민주(民主)는 합의(合意)를 뜻한다고 한 것이다. 합의 없는 다수결을 횡포로 보는 나경원은 부득이 소수결을 ‘합의’라는 개념으로 정당화하는 것이고, 급기야 소수결을 민주라 보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둘째, 국회는 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합의로 해야 하며, 법대로 하는 것은 제멋대로 횡포하는 것이라고 한다,
나경원은 민주는 다수결과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보고, 국회에서 1표라도 더 많은 다수당이 멋대로 하고 소수당의 의견을 무시하면 다수당의 횡포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다수결이 (의회)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위험에 빠트린다고 한다, 국회의원을 300명 뽑는 것은 다수결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나경원의 단언은 영락없이 국회가 소수결, 소수당을 중심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민주, 다수결(소수결에 반대되는 개념), 합의, 국회의 목적 등에 관련한 나경원의 자의적 해석은 국회 원 구성은 차치하고, 무엇보다 민주가 무엇인지, 국회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자체가 뒤죽박죽으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음을 노정하고 있다. 국회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절차조차 터득하고 있지 못하는 이가 국회의원이 되어 떡하니 자리를 꿰차고 어거지(몽니) 부리고 있으니, 국회가 엉망이 되는 것이 자명하다.
위 첫째, 나경원은 민주와 합의를 동일한 것으로 파악했으나, 그렇지 않다. 두 개념은 계통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민주는 민중이 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민주정치의 반대 개념은 과두정치 혹은 일인(군주)정치이다. 전자의 민주는 전체 국민, 민중을 뜻하고, 후자의 과두 혹은 일인은 소수가 중심이 되어 결정권을 갖는 정치체제이다. 민주, 과두, 일인 정치란 결정권을 갖는 사람이 전체 다수냐, 아니면 일부 소수냐 하는 점을 기준으로 구분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 전 고대 아테네 고명한 철학자 겸 정치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 가지 정체가 다 좋은 정치체제, 나쁜 정치체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3가지 아닌 6가지로 정치체제를 구분했다. 그런데 나경원은 자신이 대단한 학자를 능가하는 것처럼 새로운 정치이론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이른바 ‘듣보잡’ 수준의 ‘합의론’이다.
결정 과정에서 구성원 간의 합의 여부는 정치체제 구분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다. 합의가 있어야 민주정치가 된다는 논리는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이른바 ‘합의’를 명분으로, 결정권자의 수에 있어 다수가 아니라 소수에 중점을 두려 하는 나경원은 민주가 아니라, 과두 혹은 일인 정치를 지향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민주에 반대하는 민주의 적이다.
다수결의 횡포를 소리높여 외치는 나경원은 소수결을 옹호하는 것이고, 그 소수는 과두 혹은 일인이 될 수도 있다. 나경원은 일인정치의 횡포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한 예로, 나경원은 국회 내 소수당이 무력화할 것을 염려하면서, 대통령의 거부권이 국회를 무력화하는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는다.
21대 국회 마지막에 통과한 법안 4건에 대해 대통령 윤석열이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그 가운데는 여야가 합의한 것도 있는 것으로 회자한다. 그러나 윤석열은 그런 것에 대해서조차 거부권을 행사했고, 그런 대통령의 묻지마 거부권 행사에 대해서 나경원은 합의를 무시하는 소수의 횡포라는 비난을 하지 않는다.
국회에서 다수당이 소수당을 무시하면 합의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대통령이 국회 다수당의 뜻을 무시하고 거부권 행사하면, 합의를 무시한 것이 아닌 것이 되나? 이래저래 나경원의 논리 아닌 논리는 시종 다수는 무조건 무시되고, 소수의 권리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반민주적 지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서 ‘합의’를 중시하는 이론적 근거로 ‘소수의 권리 보호’라는 담론의 맹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경원을 포함하여 일부에서 다수결을 다수의 횡포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흔히 소수의 권리가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의 근거를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의 권리는 정부가 나서서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 권력이 개입하지 않고, 자유의 영역으로 남겨놓음으로써 소수의 권리는 보호되는 역설이 성립한다. 정부가 적극 개입하여 소수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명분은 오히려 다수는 물론 소수를 억압하는 단초가 된다. 권력이 보호하는 소수란 사회적 약자로서의 일반인이 아니라, 십중팔구 기득권층의 소수일 가능성이 있다. 편향적 소수 보호의 증거는 두 가지 측면에서 들 수 있다. 한편에서 개딸, 포퓰리즘 등의 굴레를 씌워 상대의 사상과 기호를 매도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자기가 속한 300인의 국회를 소수당 중심으로 운영하고자 하는 나경원의 황당한 주장이 그러하다.
나경원이 주창하는 바에 따르면, 민주는 다수결과 반대되는 개념이고, 다수결이 의회민주주의, 혹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위험에 빠트린다. 또 그는 국회의원을 300명 뽑는 것은 다수결 아닌 소수결로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하고, 1표라도 더 많다고 해서 다수당이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나경원의 이 같은 주장은 반(反)민주적인 것이다. 소수의 권리는 정치권력이 개입하는 영역이 아니라 비정치적 자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소수의 존중은 국가 권력이 나서서 다수를 억압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보충성 원칙에 의해 정부 권력이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성립하기 때문이다. 다만 정치의 영역에서는 다수결 원칙이 정립되어야 한다. 다수결을 부정하는 나경원은 과두정치 혹은 독재정을 옹호하는 민주의 적이다.
왜 상대는 포퓰리즘으로 매도하고, 자기는 다수결조차 부정하고 소수당의 의견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하는 걸까? 이 같은 차별은 불공평한 것이다. 누구나 사상의 자유가 있고(헌법에 보장), 그 사상은 옳고 그르고를 막론한다. 사람이 다소간에 편견과 기호는 갖게 마련이고 그것은 자유의 영역이다.
소수의 권리 보호는 국가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 시민, 민중 스스로가 타인의 사고, 기호를 존중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은 사고의 타당성, 옳고 그르고와 무관한 것이다. 반대로 국가권력에 의한 소수권력의 보호란 권력의 억압을 동반한 것으로,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부작용이 있다. 첫째, 소수가 약자 소수가 아니라 필히 기득권 소수의 보호로 환원될 것이라는 점, 둘째, 소수의 보호라는 명분으로 다수 의견도 무분별하게 무시될 위험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매도되는 포퓰리즘(우익이나 좌익이나), 태극기부대 등에 관련하여, 모든 사상과 종교의 자유는 그 타당성 여부를 떠나 무조건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그것이 권력의 귀추에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하도록, 권력을 분산할 필요가 있겠다. 관건은 사상의 종류나 타당성 여부가 아니라, 남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권력 구조의 관점에서 조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 예로,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것은 지금은 자유의 영역이지만(종교의 자유), 중세에는 안 믿으면 처벌, 처형받았다. 그것이 지배권력, 정치권력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이나 기호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평가를 떠나서 그러하다. 지금 한국같이 중앙의 대통령, 국회 등에 권력이 집중된 구조에서는 일정 개인 혹은 소수의 사고나 기호가 정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 국회에서 다수당의 결정권을 무시하고, 협치하자고 하는 것 자체가 국회 바깥의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경향을 띠는 것이다. 이것은 국회 내에서 위정자들끼리 타협해서 다 해먹겠다는 것이고, 그 이면에서 국민, 민중, 시민의 뜻은 무시되고, 포퓰리즘으로 매도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경원의 국회 ‘협치론’은 소수 지배에 의한 억압을 지향하는 것이다. 나경원의 ‘듣보잡’ 협치론과 반대로, 모든 사상과 종교는 매도되지 않고 존중받아야 하되, 다만 정치적 결정은 다수결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두정치 혹은 독재정 등 소수결의 횡포가 자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 둘째, 나경원은 법치와 협치의 개념을 서로 구분하고, 법치 위에 협치가 존재해야 한다고 보았다. 국회는 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협의로 해야 하며, 법대로 하는 것은 제멋대로 하는 횡포라고 규정한 것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같은 나경원의 주장은 윤석열이 시종 주장하는 ‘법치’의 개념과 반대가 된다. 윤석열의 법치 개념은 스스로 어떤 것과도 협치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공공연히 “한 사람이 지지한다 해도 내 갈 길을 가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 그러하다.
다만, 윤석열의 법치 개념은 국회의 입법을 무시하는 시행령을 통해 다수당 주도의 다수결을 무력화시키는 데 이용된다는 점에서 나경원과 닮은 점이 있다. 실제로, 윤석열의 협치론은 나경원의 협치론과 닮았다. 다수당 아닌 소수당과 협치하고, 국회 내 소수당의 의견을 다수당 위에 위치 설정하려는 목적을 가진 점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나경원의 협치론은 윤석열의 ‘나홀로’ 법치 및 편향적 협치 개념과 궤를 같이한다.
법치에 우선하는 것으로서 나경원이 제시하는 협치론은, 자신의 주장과 달리, (의회)민주주의 옹호가 아니라 그것을 배척하는 것이며, 오히려 소수의 지배를 지향한다. 이것은 윤석열의 협치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다만, 나경원은 법치 위에 협치가 있어야 한다고 하고, 윤석열은 그 모든 것을 법의 이름을 빌어 법치를 명분으로 치장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서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법치, 협치 여부를 막론하고, 나경원과 윤석열은 다수결을 혐오하고, 일인 독재 혹은 소수결을 옹호하는 반(反)민주적 성향을 가진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