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대한민국 선량을 선출하는 총선이 있다. 선거야말로 민주주의를 이루어가는 깨어있는 시민정신의 발현이다. 선거보다 효과적인 정치 참여는 없을 터인데 선거가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함은 물론이지만, 그보다 먼저 시민들의 판단력, 분별력이 중요하다 하겠다. 이 글은 2022년 대선 즈음하여 발표한 것으로 선거의 해를 맞아 다시 한번 성찰의 기회로 삼아보고자 한다.
선거는 “국민의 잔치”이니, 잔치답게 치러야
2022년도는 국운(國運)의 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곧 다가오는 3월 9일 대통령 선거, 그리고 6월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다. 한 국가의 최고통수권자이며 최고 리더, 행정의 수반이요 국권의 상징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일은 국가지대사(國家之大事)임에 확실하다.
대통령이 정권의 최고 권위를 행사하지만 그 권위는 국민에게서 나온다. 그래서 국민들은 주권(主權)의 주인으로 존엄하고 당당한 한 표를 행사하는 선거에 숙연히 임할 수 밖에 없다. 한편 선거는 그 자체로 국가적 대사를 앞에 두고 벌이는 경쟁이기에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으쌰으쌰’ 힘을 합하고 뭉치니 그 풍경이 사뭇 마을 대항 줄다리기나 차전놀이 하는 축제처럼 ‘죽기살기’로 몰입, 열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과열이나 다툼은 부족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인지라 의도적 불법이 아닌 이상에는 어느 정도 관용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2022년도 상황이 그렇게 꿈에 그리는 잔치 풍경이 아니다.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국가나 국민이 온통 팬데믹 불안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 와중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국가 안보를 더욱 위험스럽게 바라보게 한다. 정말 언제 어디서 어떤 외세가 우리를 침략할지 모른다는 국가이기주의가 야만스런 행태로 드러나고 있으니 말이다. 북한의 미사일 개발, 남남갈등 유발도 예사롭지 않고, 중국의 동북공정, 일대일로 같은 팽창주의가 우리나라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니 그 난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런 가운데 국내는 어떤가. 해방 후 이데올로기로 분단된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통일을 외치지만 좀처럼 경계와 간극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남북한 대화는 다시 소원해지고, 한반도 안보를 둘러싼 국제 동맹은 여기저기 균형을 잡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니 국정 운영이 만만치 않은 게 현실이다. 또한 법의 심판으로 전 대통령들이 수감되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어떠한 청렴한 자라도 대통령의 권좌에 도전한다는 것은 웬만한 순국의 각오가 아니면 쉽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이번 대선에 후보는 무려 12명이나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사이 김동연,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의 길을 가기로 하여 공식 후보는 줄었다.)
선거에 임하는 국민들은 사실 어려운 결정을 눈 앞에 두고 후보 당사자들보다 더 전전긍긍하는 눈치 아닐까. 연일 쏟아져 나오는 지지율 등락은 그야말로 파도타기이다. 대선은 어차피 수많은 변수들이 잠복하여 예측하기 힘든 과정이지만 그래도 이번은 더하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붉어져 나온 부정선거 논란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공명선거에 대한 열망은 더 높아지는 가운데 여야의 정쟁은 극에 달해간다. 갈등사회학에서 갈등은 사회가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문제는 의외로 심각하다. 진보와 보수, 극좌와 극우, 친중과 친미, 대북/대일 자세의 차이, 동성애, 차별금지법과 같은 세계관에 따른 구분, 게다가 경제적 양극화로 인한 사회 격차, 세대 격차 등등이 우리 사회에 색깔론, 진영논리, 갈라치기로 극명하게 대립하는 게 아닌가 심히 우려스럽다.
예로부터 동네와 동네가, 마을과 마을이 화기애애 하고 두레와 길쌈 같은 대동단결의 아름다운 풍습과 미덕을 누려운 우리나라가 어찌 이렇게 동서로 나뉘고, 남북으로 나뉘고, 빈부로 나뉘고, 학력과 경력으로 나뉘고, 부모 찬스니 인맥 찬스니 마음에 상채기 주고.... 각박한 무한경쟁사회로 변질되어 간단 말인가. 이러한 때에 대통령 선거와 같은 나라의 큰 일은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절호의 기회임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슬기로운 대한민국의 백성들은 결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믿어 확신한다. 더구나 믿음의 백성들에게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마음에 새겨 있으니 더욱 그리하리라 믿는다.
2. “영웅”을 기대해선 안된다
대선을 놓고 보면 과열경쟁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일등이 모든 권력을 차지하는 승자독식 같은 경쟁이 곧 대선 아닌가. 그리하여 여야는 각각 죽기 살기로 싸울 수 밖에 없다. 최종승리를 위하여! 정의로운 사회에서 불법, 위법, 탈법은 당연히 아웃이다. 공명정대하게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그래서 국가 비전을 제시하는 공약이 중요하고 정책 대결이 먼저이다. 그런데 그동안 벌어진 선거 열풍은 그만 네거티브로 얼룩졌다. 후보 검증이라는 명목 하에 당사자와 가족은 물론 수십 년 지난 일까지 파헤쳐져 가히 조선시대 참형 중 하나인 부관참시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옛말이 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 아니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 시대가 어려울수록 백성들은 ‘구원자’를 기다린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나아가 신앙 세계에서는 구원자에 대한 기대가 더하다. 천여 년 전 궁예가 일어나 미륵사상을 내세워 신묘한 구원자 행세를 했고, 조선 시대에도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같은 백성과 함께 하는 영웅호걸들이 전설처럼 등장했다. (서구에서는 의적으로 평가받는 로빈훗, 조로 등이 견비될까) 시대가 혼란할 때 세상을 평정하고 백성들을 맘 편히 살 수 있게 하는 비범한 인물을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런 기대이리라. 그러나 이런 민심의 기대를 악용하는 무리들이 없지 않으니 문제였다.
예를 들면, 독일이 일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전쟁배상금에 허덕이고 바이마르공화국이 실패로 끝나가는 도중에 미국발 경제공황이 거세게 유럽으로 몰려왔다. 소련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서구로 점점 그 세력을 뻗치자 독일인들은 독 안에 든 쥐처럼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등장한 자들이 나치주의자들이다. 위대한 게르만제국을 재건하자는 기치를 들고 인기 몰이를 하더니 급기야 히틀러라는 낯선 궤변가를 모셔온다. 아니 그들은 히틀러 같은 몰아적 이데올로그(Ideologue)가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에 괴벨스라는 광적 선동가가 합세하여 교묘한 선전선동 전략(Propaganda)을 만들어 갔다. 결국 나치당은 독일 전역에서 국회 다수당으로 정권을 쥐게 되고, 히틀러는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다. 모두들 민족을 구원할 영웅이 도래했다고 믿었다.
히틀러는 당시 이렇게 공공연하게 말했다. ‘국민 여러분들이 나를 만나게 된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다. 나는 여러분들을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궁핍, 국제적 고립에서 구원할 것이다.’ 그러자 나치주의에 물든 신앙인들이 신학적 포장을 가미했다. ‘히틀러는 독일을 구원할 정치적 메시야다.’ ‘이 고난의 때에 하느님이 보낸 지도자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대중조작(Manipulation)에 속아 넘어갔고, 끝내 히틀러는 총통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그 뒤는 모두가 잘 아는 나치 파시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과 이차 세계대전의 비극이 따라왔다.
이런 인위적으로 조작된 영웅이 대통령이 되다니. 그래선 안될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역사는 분명히 경고하고 있다.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침략과 무력 충돌은 거의 이런 유형의 인물들에서 시작된다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오늘날의 대선은 그런 불세출의 영웅을 모셔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선 후보에서 ‘구원자 신드룸’을 극복해야 한다. 대통령으로 뽑으면 그가 모든 것을 일사천리로 해결할 것이다, 시대적 난제 척척 풀어갈 것이다, 또는 먹고살기에 고단한 삶을 한방에 해결해줄 것이다? 노, 노! 그런 몽상, 망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대통령도 우리와 같은 상식과 교양의 시민이요 어느 분야의 전문가일지언정, 슈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 같은 초능력자가 아니다. 어느덧 우리는 만화적 상상력에 심취하여 고담시 같은 위기의 나라에서 구해줄 어벤져스를 기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니체나 칼라일의 영웅론은 퇴색해 버린지 백 년도 더 넘었는데 아직도 선거철이 되면 공상에 젖어 영웅을 찾아다니기에 분주하다. 이제 난세에서 백성을 구할 영웅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곧 주권자로서 대통령과 함께 나라를 구해야 할 것이다. 지성과 감성, 인격에 영성이 겸비된 균형잡힌 성품이면 좋겠다. 국정 운영의 경험은 기본이 아니겠는가. 닳고 닳은 껍데기 정치인은 가라! 중요한 것은 그와 함께 할 우리가 있다는 것이다. 기드온의 삼백 용사 같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의 “남은 자”(Remnant) 같은 우리가 있다고 겸손히 고백하자.
3. “열광주의”에 취해서는 안된다
대통령 선출하는 과정에 나부낀 현란한 구호들, 그동안 유세하면서 쏟아낸 무수한 말들. 이름하여 공약이다. 화려하게 장식된 이미지들, 알다가도 모를 전문 정치 용어들, 백년 안에 다 이루지 못할 약속들, 그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안되려면 가식과 위선을 벗어버리고 정직과 진실에 기초해야 한다. 그런데 유세차는 붕붕 지나가고 마이크는 웽웽 울리고, 무슨 소리인지 귓가에 울리고만 떠나간다. 공약을 확인할 자료가 부족하니 미디어에 의존하는데, 어찌나 가짜뉴스가 많은지 진위를 가리기 힘든다. 뉴스를 검증하는 팩트 체크도 부담이다. 후보들은 자주 뜬소문에 진가가 가려있다. 그것도 현대의 선거 전략이리라. 음모론이 진실을 분간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야웅하는 식의 쇼는 안된다. 선거는 선거답게 국가 비전을 조목조목 정리, 설계하여 세워가는 국가 건축학개론이 되어야 한다. 그저 뭉뚱그려 ‘잘 살게 해준다’ ‘믿어주십쇼 여러분’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선거쇼 배후에는 열광주의가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위험하다.
열광주의(Enthusiasm)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정을 증폭하여 판단을 흐리게 한다. 팬덤에 자주 응용되는 열광은 나름 긍정 효과가 있지만 선거에서 과열되거나, 의도적으로 작동시킬 때 우민정치로 흐른다. 그야말로 국민이 개돼지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국민모독이 아닐 수 없다. 나치주의자들이 성공적(?)으로 해낸 작품이 바로 이 열광이다. 밤이나 낮이나 쉬지 않고 라디오를 듣게 한다. 흥겨운 음악을 끝나면 연설이 울려퍼진다. 집단수련원에서 받는 것 같은 정훈 강령이 반복된다. 목청은 한껏 고조되어 있다. ‘위대한 조국 건설’ ‘다같이 뭉치자’ ‘전진 앞으로’ ‘나보다 조국을 먼저’ 등등. 끝내 국민들은 국가의 부속품처럼 느껴지고 분별력과 비판력을 잃게 된다.
대선을 지나오면서 미디어는 끊임없는 공방전, 난타전을 실어날았다. 부추긴 감도 다분하다.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녹취록들은 눈살을 찌뿌리게 한다. 무속과 이단 연루설 등은 또 어떤가. 설마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후보 선택에 자료가 많으면 좋겠지만 정책과 공약은 뒷전인 모양새다. 팩트를 넘어서 국민들의 자존감, 인내심에 먹물을 끼얹는다. 진검 승부의 검증은 어디 갔는가. 어찌하던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날려야 한다는 치졸한 승부욕 같아 보인다. 그러다보니 열광주의는 부정적으로 작동한다. 선거의 주체로서 국민은 거꾸로 회의감, 자괴감, 거부감 등에 빠진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네거티브로 공방을 벌이는가. 그런 풍경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 주님, 우리의 마음을 굳건하게 하여주소서.
4.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자
선거 때마다 광풍처럼 밀려오는 헛소문들. 실체는 가려지고 허상이 더 야단스럽게 세상을 흔든다. 선거 거부감이 드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신물이 난다’ ‘짜증난다’는 심정은 국민들이 선거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지수가 낮지 않다는 반증이다. 이제 컴 다운! 마음을 추스리고 진실을 바라보자. 과연 대한민국의 현재 과제를 지혜롭게 풀어내고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사령탑에 누가 어울릴 것인가? 최고 리더십에, 거버넌스의 책임을 맡길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개혁의 중심 모토는 샘이었다. 그 샘은 다른 용어로 하면 원전(Original Text)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있는 현실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변해가는 것을 붙잡기 보다 원래 어떠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한 대안이요 지혜로운 방법이다. 원전으로 돌아가자, 근본으로 돌아가자, 샘으로 돌아가자(ad fontes)! 종교개혁가들이 선례를 보여준 것처럼 우리도 대선 앞에서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한민국의 현실과 미래를 가감없이 점검하고, 국민 모두가 합심하여 복지 증진의 비전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게 기본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국가철학이 뜬구름 잡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눈 앞에 드러나는 현상에 급급하여 미봉책으로 때우려 하지 말고, 기본부터 탄탄히 다지는 행동을 실천해야 한다. 모래 위에 나라를 건설할 수는 없다. 주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5) 모든 것의 기초 되시는 하나님 말씀 위에 나라를 세워야 한다. 이러할 때 하나님 나라는 우리 국토 안에서도 이루어져 가리라.
5.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자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구했는가? 국정 운영에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 다양한 의견을 통합할 포용의 정치인, 우리 마음에 드는 대통령감, 위기 극복에 능한 경력 소유자 등등. 그래서 우리나라 과거 대통령들은 행복한 은퇴를 보냈는가? 어쩌면 우리는 우리 마음에 맞는 이들을 지도자로 구했는지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친 것처럼.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 8:5)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지도자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드는 지도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선거를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내려놓고 더 철저하게 기도했어야 했다. 우리는 진정어린 기도보다 먼저 자기 이익에 눈이 멀었었다.
선거를 앞두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되 중언부언 할 것이 아니고, 내 배와 집단의 욕심을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마 6:33)여야 한다. 이방인처럼 기도해서는 안되겠다. “...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6. 믿음으로 “시험”하여 영광 드러내자
지난 시간, 코로나 극복하는 과정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교회가 예배를 통하여 마치 감염에 소홀한 것같은 인상을 주었다고 핀잔이 들끓었다. 코로나 방역을 두고 교회 탄압, 예배 방해, 신앙의 자유권 침해라는 말까지 나왔다. 교회가 찬반으로 나뉘고, 목회자와 교인들이 나뉘는 아픔도 겪었다. 거기에 저항하는 크리스찬들을 두고 무모하고 무례한 신앙인이라는 딱지도 붙여졌다.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방역 관련하여 논쟁은 논외로 하고)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대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대명제다. 이는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 코로나 속에서 선거가 치러진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기독교인에게 모든 상황은 섭리와 연결되어 있다. 고난도 유익이 될 수 있고, 환란도 축복이 될 수 있다. 이는 섭리를 전제해야 가능하다. 말라기의 예언을 하나의 행동 방안으로 생각해 본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10:10) 선거를 앞두고 믿는 자들이 이런 다짐을 해보면 어떨까. 선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마음이 드시도록 그렇게 행동해 보자.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며 전심전력하여 복음에 합당하게 임해보자.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한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 그렇게 하므로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선거를 통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그게 선거에 임하는 자세가 아닌가. 공명 정대한 선거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일 것이다.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1:1)
7. 대선 후, 국민화합과 대동단결
아름다운 미풍양속의 대한민국, 어느 새 갈등 사회가 되었다. 안타깝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는 여야 대립으로, 경제는 양극화로, 사회는 노사분쟁으로, 교육은 대입을 위한 사교육 전쟁으로, 문화는 극단적 재미와 쾌락주의로 갈등은 점점 전투 양상을 띄어간다. 그래도 다행이요 감사한 것은 종교간 분쟁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타 나라에서는 종교 분쟁이 내란 수준으로 치닫는 곳도 적지 않은 점을 고려한다면.) 여기에서 종교계와 종교인의 역할이 요구된다.
잔학한 철권 통치를 휘둘렀던 나치에 저항한 본회퍼 목사, 그는 기독교인들이 시대를 책임지지 못하고 권력에 아부하고 야합하여 국가 공동체를 타락하게 한 원인을 “값싼 은혜”에서 발견했다. 복음에 따라 행동하지 못한 기독교인들 때문에 나치주의자와 히틀러가 권력을 얻게 되었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값비싼 은혜를 싸구려 취급했다는 것이다. 그 치명적 결과로 사악한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2022년 대선은 지나간 역사의 과오를 다시 밟아서는 안된다. 누구보다도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작은 영역에서부터 믿음의 행동을 해야한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면 결과가 어떻게 나오던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 대동단결을 도모하자. 또 분열하고 싸운다면 후대에 어떤 나라를 물려줄 것인가. 후손으로부터 무시 당하고 쫓겨나 바깥 어두운데서 이를 갈며 부끄러워할 일은 해서는 안되겠다. 오늘도 지혜가 부르짖는다. 코람 데오(Coram Deo), 코람 데오!
선거가 지나면 모두가 흥겹게 마을 잔치 치룬 마음으로 마당도 쓸고 잔치상도 같이 치워보자. 서로가 상처준 일 있으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정겨운 사랑으로 보듬어 주자. 승자는 거만하지 말고 패자는 비굴하지 말고 내일의 대한민국을 위해 다시 하나가 되자. 그러다 마을녘에 달무리 풍성히 내려앉을 양이면, 어허~ 내일은 날이 맑고 쾌청하리니 대풍을 주시려나! 다같이 주님 앞에 모여 찬양으로 영광돌리는 은혜스런 꿈을 꾸어보자.
-추태화 이레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