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일제의 한국 기독교 탄압을 고발한다!
행사명: 일제청산연구소·C헤럴드·불금시사 제1차 월례포럼
주 관: 일제청산연구소(소장 양진우, www.antijapan1910.com)
주 제: 두 갈래 길, 순교와 부일 협력
강 사: 역사학자 김승태 박사(독립기념관 자료과장,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 등 역임)
일 시: 2023년 6월 25일(일) 오후 4:30~5:30
장 소: 경기도 하남시 초이화평교회(초이동 97-8, 담임 양진우 목사)
ZOOM: 아이디(895 5565 8162), 비번(370634).
https://us02web.zoom.us/j/89555658162?pwd=YkdiaTROdVBVQ0N5dzdYdWNqb29VZz09
‘한일관계의 올바른 관점’을 모토로 설립된 일제청산연구소가 C헤럴드·불금시사와 공동으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기독교 탄압을 고발하는 제1차 월례포럼을 개최합니다.
6월 25일 일요일 오후 4시 30분부터 경기도 하남시 초이화평교회 1층과 ZOOM에서 열리는 이번 월례포럼에서는 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장인 김승태 박사가 ‘두 갈래 길, 순교와 부일 협력’을 주제로 강의를 합니다.
김승태 전 소장은 홍익대·서울대·한신대를 거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독립기념관 자료과장과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을 역임했습니다. 2012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수여하는 임종국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재는 수원 생명평화교회 목사로 봉사하며 역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강의의 주요 부분을 아래에 첨부합니다. 언론사 관계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기대합니다.
강의 주요점: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에서 아전 출신 농민인 주현성의 아들로 태어나 오산학교와 평양 장로회신학교 등을 거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가 운명적인 순교의 길로 접어든 것은 부산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에 이어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한 뒤인 1938년이다.
전년도인 1937년에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전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황민화 정책과 신사참배 등을 독려했다.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을 제정한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신사참배를 강요할 목적으로 경찰력까지 동원했다. 일제 공권력이 기독교 박해에 직접 투입됐던 것이다. 그해 9월 30일 평안남도 경찰부가 ‘신사참배 문제 해결 공로 경찰관’ 89명에게 표창장을 수여한 사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단순히 행정관청에 의한 강요가 아니라 경찰 무력을 동원한 박해였음을 보여준다.
신사참배는 하나님이 아닌 일왕을 섬기라는 강요였다. 주기철 목사는 일왕을 믿으라는 강요와 탄압을 믿음과 육체로 받아냈다. 일제의 거듭되는 경고와 잇따른 구속을 무시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는 일제 경찰의 구타와 발길질을 받으면서도 “당신은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며 “그때 당신은 이런 것들과 다른 죄들에 대해서 대답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의연한 모습까지 보였다.
일제는 주기철 목사의 가족들까지 탄압했다. 이들도 목사 사택에서 쫓겨나고 고난의 길을 걸었다. 이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주기철 목사는 일왕을 섬기라는 강요를 끝끝내 거부했다. 고문과 수감으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1944년 4월 21일 부인과 마지막 면회를 한 뒤 당일 밤에 순교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이 시기에 친일파 목사인 김길창은 정반대 행보를 걸었다. 국회 반민특위는 조선기독교연합회장 등을 역임한 그가 “한국 기독교인 황민화 운동의 수뇌 간부로서 활약하고,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된 이후에는 경남 교구장으로서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주창하고 이에 반대하는 목사와 교인들을 일본 경찰과 결탁해 탄압”했다며 그의 죄목을 적시했다.
김길창은 일제가 패망한 뒤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을 주워들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서전에서 그는 “남들은 들뜬 해방의 기쁨에 도취하고 있을 때 나는 조용히 적산 부지로 된 교회 대지 150평을 평당 2000원으로 불하받기에 바빴다”라고 회고했다. 동아대학교 설립에 참여한 그는 학교법인 남성·대동·훈성·한성 등을 세우고 부산신학교 등도 건립해 영향력을 늘려갔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는 일제의 비인도적·전근대적 종교탄압에 대한 명백한 고발이요 폭로였다. 그렇기 때문에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한 그의 신앙 절개와 항쟁과 희생은 암흑 시대를 밝히는 등불로서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김길창은 일제와 타협하고 순응하는 길을 택했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고 확장시키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양심이나 민족, 교회는 그의 안중에 없었다. 그런 사람이 해방 뒤 기독교와 교육계에서 영향력을 늘렸고, 우리 사회는 그를 용납했다. 지금이라도 크게 반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