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방적 살처분에 반대하며
우리는 지난 20세기 아우슈비츠에서 ‘해결’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집단 학살의 비극을 기억하고 있다. 이후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도 생명은 집단적 학살로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다시 동물전염병에 대한 ‘해결책’으로 ‘집단적 살처분’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는 단지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닌 가금류라는 이유로 그 잔인함과 부당함을 묵인하고 있을 뿐이다.
올해 1월 21일 농림축산식품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 전북에서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AI)가 발생한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발견된 조류독감 확진 건수는 총 66건이다. 이에 따라 전염 방지대책이라는 미명으로 자행된 집단적 살처분은 같은 달 19일 기준 무려 1,929만여 마리에 이른다. 산란계가 878만 8000마리, 육계는 552만 9000마리, 육용오리 162만 3000마리가 살처분되었다. 2,000만 마리에 달하는 동물이 전염병 문제 해결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집단 살처분되는 참혹한 상황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이 일이 생명에 대한 존중과 성찰이 없는 사회가 만들어 낸 일임을 돌아보게 됐다.
조류독감 발생 현장으로부터 인근 3km내 모든 농가의 가금류를 몰살시키는 집단 살처분 정책의 명분은 예방이다. 그러나 이는 백신 접종이라는 훨씬 더 과학적이고 명백한 예방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류 관련 식품의 수출에 유리한 조류 인플루엔자 청정국 지위를 유지하려는 경제적 논리의 결론일 뿐이다. 매년 연례행사를 치르듯 찾아오는 AI 조류독감과 수천만 마리에 이르는 가금류의 대량 살처분의 방식은 예방의 실효성도 낮을 뿐더러, 농장주를 비롯한 모든 과정을 집행하는 관계 당사자들,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정신적, 심리적, 경제적, 환경적 위협으로 돌아올 뿐이다. 이에 우리는 관계 당국을 향해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첫째, 무조건적인 살처분 행정명령을 즉시 중단하라!
선제적 예방이라는 이름으로 질병의 유무를 막론하고 살아있는 가축 모두를 집단 살처분하는 일은 최선의 해결책도 아닐뿐더러, 우리 사회에 생명 경시 문화를 확산하는 일이다.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거리두기와 이동의 자제를 권고하듯이, 조류독감의 확산 방지는 살처분 대신에 사람이나 차량의 이동 제한이나 금지 등 ‘차단방역’을 강화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아가 예방 백신의 사용으로 반복되는 가축전염병의 재난으로부터 가축과 농가들을 보호하기 바란다.
둘째, 동물권과 가축생활권이 보장되는 ‘동물복지 축산정책’을 확대하라!
가축 전염병에 대해 무조건적인 집단 살처분 방식으로 막고자 하는 것은 이제 막 시작된 ‘동물복지 축산정책’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인간의 먹이가 되는 동물이라도 살아있는, 살고자하는 의지를 가진 생명이다. 동물을 감금틀에 가두고 성장촉진제와 항생제를 먹여가며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경제논리에 충실한 공장식 축산시스템을 규제하고, 생명을 존중하며 안전하고 건강한 축산 환경을 만들어가는 동물복지 축산을 적극 지원하고 확대하기 바란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다. 생명을 담은 외형은 다를 수 있어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은 인간이 섣불리 그 가치의 경중을 가를 수 없다.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가금류의 생명 역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생명에 대한 무자비한 침탈이 오늘의 코로나19 사태를 만들었음을 기억하며, 정부와 관계 당국은 가금류 집단 살처분 행정 명령을 당장 중단하고, 신속히 생명을 존중하는 방역체계와 대책을 세우는 일에 역량을 집중하기 바란다.
2021년 1월 17일
기독교환경운동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