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뉴스 제휴사뉴스] 최재석 기자 =요즘 교회마다 교인들이 줄고 있다. 개신교의 성장은 1960년대부터 꾸준히 이어져 왔고, 1970년대에는 산업화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한국 개신교는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급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그 성장세가 급격하게 둔화하였고, 최근에 와서는 감소세로 돌아서게 되었다. 요즘 ‘안나가’를 거꾸로 해서 만든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이 늘고 있다.
2005년에 실시한 인구센서스에서 한국 개신교인 수는 10년 전에 비해 1.6퍼센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때 1천만 성도 운운했는데 862만 명으로 줄었으니 그것은 충격이었다. 2005년 이후에도 개신교 주요 교단들의 교인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9월 기준 개신교의 주요 교단은 전년도에 비해 교인 수가 8,000명에서 4만 명까지 줄었다고 보고되었다. 그래서 지금 개신교인의 수가 600만 명이 채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5년 사이에 거의 절반으로 줄었으니, 이것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절박한 위기를 맞아서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는 지난 1월 16일 페이스북 ‘교회를 떠났다’의 이성민 운영자와 청어람 아카데미 양희송 대표를 초청해서 가나안 성도에 관한 대책을 들었다. 여기서 이성민은 “믿음이 없다고 가나안 성도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양희송은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이들의 고민과 실험에서 비롯된 이야기를 경청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교인의 급감세는 중년층에서보다 청장년층에서 두드러진다. 우리는 그동안 주목하지 않고 있었지만, 지난 25여 년 동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났기 때문에 지금 교회에는 청장년층이 많지 않다. 그래서 지금 중소형 교회의 찬양대에는 젊은 대원이 거의 없고, 5, 60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주일학교에 학생이 적어졌는데, 그것은 아이들을 기를 나이의 장년층이 적은 데다 그들이 아이를 적게 낳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인수의 감소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952년에 미국인의 75퍼센트는 신앙이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1970년 대 중반에는 동일한 응답을 한 사람의 비율이 절반 아래로 떨어졌다. 교회 출석은 1958년 인구의 50퍼센트에서 1969년에 40퍼센트로 감소했다. 더 놀라운 것은 20대들의 교회 출석률 감소다. 1957년에는 20대의 51퍼센트가 교회에 나왔는데, 1971년에 와서 그 숫자가 28퍼센트로 줄었다.
요즘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 교회에서 큰 문제로 대두했다. 젊은이들이 없는 교회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우리나라보다 40년쯤 먼저 교인이 감소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여파가 한국에도 머지않아 밀려오리라고 예측했을 만도 한데, 그것에 대해서 전혀 대처하지 않았다,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두란노, 2018)에서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형적인 복음 제시에 대해 혼란스러워하고, 거부하고, 적대적으로 변했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교회가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그들이 납득할 만한 답을 하지 못한다고 불평한다. 그래서 소통이 없는 교회에 거부감을 느낀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외면하는 것은 아주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나는 이 글에서 교회가 젊은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려고 한다. 내가 제시하는 것은 가이드라인의 수준에 머물기 때문에, 세부 사항을 원하는 독자들은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가이드라인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 가이드라인을 수긍하는 사람이라면 세부 사항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우선 젊은이들과 소통이 없는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겪는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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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의 신앙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은 어제와 오늘이 다를 만큼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천체 물리학이나 전자생물학이 발달해서 자연이나 인간에 대한 기존의 생각은 설 자리가 없어졌다. 산업면에서도 3차 산업의 시대를 뒤로 하고 4차 산업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 그리고 차이가 있는 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상대주의나 다원주의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다. 정보화의 시대, 소통의 시대에 젊은이들은 국경을 뛰어 넘어서 온갖 문화와 접촉하고 있다.
이러한 젊은이들이 오래 전에 기록되거나 정립된 성경의 내용과 교리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세상을 등지고 있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성경만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런 교회가 젊은이들의 질문에 구태의연한 설명을 반복하거나 우격다짐으로 그들을 몰아세울 때, 젊은이들이 거부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목사들의 수준이 낮다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션 맥도웰은 <다음 세대를 위한 변증>에서 오늘날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의문을 갖는 문제들에 대해서 납득할 만한 답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상 교회에서는 젊은이들이 납득할 만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무조건 믿으라고 우격다짐을 한다.
신성종 목사의 『목회유머집』에 그런 유격다짐의 예가 나온다. 하영조 목사가 연예인 교회를 지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 목사가 동정녀 탄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뒷줄에 앉아 있던 젊은 연예인이 손을 들더니 “목사님, 어떻게 처녀가 아기를 낳나요?”라고 질문했다. 그 말을 들은 하 목사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사실을 열심히 설명하면서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 젊은이는 계속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구봉서 장로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 후배를 향해서 소리쳤다. “야, 인마! 마리아의 신랑 요셉도 믿었는데 네가 뭔데 안 믿어!”
목사의 가르침에 의문을 갖는 젊은이들은 이렇게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납득할 만한 답을 듣지 못할 때 입을 다물고 만다. 입을 다무는 그들의 마음속에는 거부감이 싹트게 마련이다.
어느 무신론자의 말이다. “어릴 때는 교회 안에서 자랐는데, 이제 더 이상 신앙이 이해가 안 돼요. 아무리 의문점을 이야기해도 쉬쉬하기만 하고 나를 죄인 취급하는 걸요. 그래서 결국 믿을 수 없게 되었어요.” 과거의 권위적인 사회에서 젊은이들이 윗사람의 말을 고분고분 따를 때는 납득이 잘 되지 않더라도 부모를 따라서 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탈권위적인 문화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태도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가 된다.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포이에마, 2014)을 쓴 양희송도, 『교회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5)의 저자 정재영도 젊은이들의 솔직한 질문에 답하지 않는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소통의 문제다. 특히 양희송은 “성도들을 유치원에 계속 머무르게 하는 우민화 전략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정재영은 『한국교회, 청년이 떠나고 있다』(동연, 2017)에서 십대에 교회에 다니던 미국의 젊은이들의 60%가 고등학교 졸업 후에 교회를 떠난다는 데이비드 키네먼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젊은이들이 신앙에 대한 의문을 비치면 교회에서는 그들의 의문을 묵살하고, 예술이나 과학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면 그런 것은 기독교인의 소명이 될 수 없다고 무시하기 때문이란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와 미국교회는 비슷한 것 같다. 교회에서는 젊은이들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들이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정재영의 말대로 기성세대는 그들의 멘토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교회에서 좋은 멘토를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곳을 기웃거린다.
나는 일전에 어느 젊은 집사에게서 목사들의 판에 박힌 설교보다는 법정이나 법륜 스님의 강론이나 젊은이들과의 대화를 YouTube에서 듣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대학생이든, 직장인이든, 과학자든 가리지 않고 듣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이야기한다고 했다. 특히 신구약의 차이를 언급할 정도로 성경을 소상히 알고 있는 데에 놀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불교의 교리는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주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들을 만하단다. 한 마디로 그들의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은 성경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보의 시대에 사는 젊은이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 교회가 젊은이들이 납득할 만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소통할 수 없는 교회를 떠나는 것은 불가피하다. 교회에 있는 젊은이들도 나가는 판에, 교회 밖에 있는 젊은이들이 교회에 들어오려고 하겠는가?
젊은이들이 떠나는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 교회를 살리려면 젊은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마치면서
김성 목사는 『성서고고학 이야기』(동방미디어, 2002)에서 젊은이들의 합리성과 성서의 비합리성을 대조시키면서 고대인의 비합리적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비합리적이고도 신비스런 사건들 때문에 오늘날 성서는 젊은 층으로부터 외면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합리성의 관점만 갖고 있지 결코 성서를 기록하고 편집한 고대인들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런데 김 목사는 문제가 있는 것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교회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건이 비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고, 그 “비합리적이고도 신비스런 사건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젊은이들은 그것들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데이비드 키네먼은 『청년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국제제자훈련원, 2015)에서 “신학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는 조심스럽게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에 화가 나거나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다. … 나 자신도 젊은이들의 견해나 행동을 변호하려는 뜻은 없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를 외면하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날 것이다. 그들을 붙들려면 그들의 태도를 감싸 안을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은 열린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데, 교회는 그들을 닫힌 근대 이전의 사회로 끌고 가려고 한다. 그래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 미국의 선교사들이 근본주의적 신학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의 교회에서는 근본주의가 신앙의 근간이 되었다. 현대과학을 배운 젊은이들이 어떻게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창조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 시대에 맞게 개혁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서 한국교회도 미국교회처럼 될 것이다. 잘 알다시피 지금 미국에는 큰 교회건물 안에 노인들 몇 명이 모여서 예배하는 교회가 많다. 그리고 50여 명 모이는 교회에서 보면 머리가 하얀 노인 몇 명이 찬양대석을 지키고 있다. 신앙 가정에서 자란 미국의 젊은이들의 59%가 교회를 떠났고 11%가 무신론자가 되었고, 단지 30%만이 교회에 나간다는 통계가 나왔다. 그 30%도 주일마다 나가는 것이 아니고 가끔 나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란다.
글로벌 시대에 한국의 젊은이들은 미국의 풍조를 따라가고 있다.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한국교회도 미국교회처럼 텅텅 빌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는 젊은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그들이 납득할 만한 답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 교회가 그들을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젊은이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젊은이들이 납득할 수 있는 답을 마련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 반드시 해내야 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맡겨진, 서둘러 제출해야 할 숙제다. 삼성의 총수 이건희는 글로벌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처자식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사업가의 투박하지만 절실한 표현에 담긴 긴박감을 교회의 지도자들도 느껴야 한다.
젊은이들은 계속 교회를 떠나고 있다. 그들을 붙들어놓지 못하는, 달리 말해서 그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